Master Tailor: 광복동 꽃할배 (2015)


2015. Color. HD. 60min.
2015 Korean Delegation in Hot Docs Canadian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Aired on MBC in South Korea

A tailor in his 60's-an Instagram star-based in Busan, who is living a whole new life, actively communicating with the younger generation, makes his first journey to Italy, home of male fashion.

연출: 안지환
프로듀서: 한선희, 임홍재
글 구성: 최현정
촬영: 왕민철
편집: 이형석
조연출: 박지용

MBC 다큐스페셜 2015.12.21 방영
방송콘텐츠진흥재단 2015 그린다큐멘터리 제작지원작

시놉시스

인스타그램에서 2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확보하며 SNS 스타가 된 부산 광복동 맞춤양복 재단사 여용기. 국제시장 인근의 광복동은 1960-70년대 서울의 명동보다 더 유명한 찬란한 맞춤양복 거리가 있었다. 여용기는 한때 광복동에서 가장 성공했던 재단사였으나, 기성복이 밀려들면서 본업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25년 만에 ‘마스터 테일러’로 복귀하면서 SNS를 통해 멋진 스타일을 뽐내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 광복동 꽃할배 >는 부산의 오랜 양복 장인들이 100% 수제 방식으로 단 한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드는 섬세한 절차를 소개하면서, 한국 양복사(史)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광복동 양복 장인들의 면면을 재발견한다. 또한 여용기 재단사가 생애 처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 화려한 남성 패션의 경연장 ‘피티 우오모(Pitti Uomo)’에 참가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한 사람이라도 똑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비스포크(맞춤양복)가 있다. 여용기 재단사의 남다른 삶을 통해 맞춤양복의 가치와 멋있게 늙는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본다.

Synopsis

In a fashion street near Nampo-dong, the hottest shopping district in Busan, master tailor YEO Youngki is living his second heyday of life. The 63 year old tailor is catching popularity among youngsters, earning a nickname "Nampo-dong Nick Wooster." YEO's instagram account has more than 10,000 followers and his new photo uploads are gaining a few hundred "likes." YEO was once a successful tailor as well as the CEO of his own bespoke boutique. However, he failed in his business and stopped tailoring for a long time due to the industrialization of the fashion market. He started his tailoring job agin a year ago, and now communi- cates with the younger generation on SNS and makes clothes with his artisan spirit as a tailor which he has kept within for 25 years. His first and last wish is to join Pitti Uomo, world's greatest menswear fair held in Italy's Florence, and compete with sharp dressers from all over the world. Will YEO's new challenge in his 60's help him make his wishes come true?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제작지원

2015년 방송영상제작지원 '그린다큐멘터리' 선정작
‌Sponsored by Broadcasting Content Promotion Foundation in 2015

MBC Special 방영

‌2015년 12월 21일 MBC스페셜: 광복동 꽃할배 방영
Aired on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in December 21‌st, 2015.

Clips‌  MBC 저작권 제한으로, 한국 내에서는 재생할 수 없습니다




‌Press  언론보도

‌‘광복동 꽃할배’ 여용기, 2만 팔로워 할배 생애 첫 피렌체 가다

2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확보한 재단사 여용기 씨(63)가 에 출연했다.
여용기 씨는 한때 ‘유행은 광복동으로부터’라고 불릴 정도로 찬란했던 부산 광복동 맞춤양복 거리서 가장 성공한 재단사였으나 기성복의 흐름 속에 본업을 접어야했다.
그러나 여용기 씨는 25년 만에 재단사로 복귀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멋진 스타일을 뽐내며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여용기 씨는 21일 에 출연해 100% 수제방식으로 비스포크 정장을 만드는 섬세한 절차를 소개함과 동시에 그가 생애 처음 발을 디딘 피렌체 여정을 공개했다.
여용기씨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 ‘피티 우오모(Pitti Uomo)’에 참가해 자신만의 ‘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여용기 씨는 재단사로 남다른 삶을 뽐내며 시청자로 하여금 멋있게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스포츠 경향 2015.12.22.
‌‘광복동 꽃할배’ 여용기, 이탈리아 남성복 박람회 가다

‌1960~70년대 서울 명동 뺨치는 멋쟁이 골목으로 불린 부산 광복동. ‘유행은 광복동으로부터’라는 말을 할 정도로 찬란했던 맞춤양복 거리가 있었다.
광복동의 양복 재단사 여용기(62)씨. 한때 광복동에서 가장 성공한 재단사였으나 기성복의 흐름 속에 본업을 접어야 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그는 다시 재단사로 복귀했다. 재단 가위를 놓은 지 25년 만이다. SNS를 통해 청년들과 소통하며 은발의 꽃할배는 광복동의 인기 스타가 됐다.
‌청년들과 소통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여용기 재단사는 난생 처음으로 화려한 남성 패션의 경연장,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을 준비한다. 세계의 멋쟁이들이 모여드는 남성복 박람회 ‘피티 워모(Pitti Uomo)’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피렌체에서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세계 최대의 남성복 박람회인 ‘피티 워모’는 세계 남자들의 옷과 스타일의 각축장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한 벌의 양복을 만드는 데 최소 2주가 걸리지만, 급박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여용기의 동료인 바느질 장인들이 총동원된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도시 피렌체, 전통을 지켜가는 유럽의 맞춤양복 시장을 처음으로 경험하며 여용기는 ‘기술’이 아닌 자신만의 ‘선’을 찾기 위한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새로운 세대에게 맞춤양복 기술과 가치를 전하는 마스터 테일러 여용기. 단 한 사람을 위한 1만2000땀의 손바느질로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하며 맞춤양복의 특별한 가치를 생각해 본다. 23일 밤 ‘MBC 다큐스페셜’에서 볼 수 있다.


뉴시스 2015.11.22.
‌다큐에도 밀린 '힐링캠프', 시청률 2.6%까지 하락

‌SBS '힐링캠프'가 월요일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꼴찌를 기록했다.
22일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날 오후 방송된 '힐링캠프'는 시청률 2.6%(이하 전국 기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방송분보다 1.4%p 하락한 수치이자 같은 시간대 3위의 기록이다.
이날 방송된 '힐링캠프'는 '배우가 아닌 가수 유준상' 특집으로 꾸며졌다. 해당 방송에서는 유준상이 출연해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한편 같은 시간대 방송된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는 6.8%로 월요 예능 시청률 1위를 차지했으며 MBC 다큐스페셜 '광복동 꽃할배'는 3.8%의 시청률을 보였다.


‌더 팩트 2015.12.22.



‌Korea Pitching Delegation Team at Hot Docs Canada  캐나다 핫닥스 다큐멘터리 필름 페스티벌 한국 델리게이션 팀




‌Early Treatment Work  트리트먼트 작업


S#1. 미나까이 백화점, 양복, 그리고 ‘섀비로’
“엔날에는 양복을 섀비로라꼬 했다꼬"
 국제시장 노상에 낡은 미싱기를 가져다 놓고 옷수선을 하는 한 할머니가 말한다. 여기서 저기까지 모두 다 양복점이었다고. 그 시절에는 양복을 일본말로 ‘섀비로’라고 했다고 한다.
광복동의 남성복 매장 ‘매료’의 재단사 여용기(63세)가 고려직물에서 복지를 끊어다 한아름 안고 그 옆을 지나간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빠르게 걸어가는 뒷모습의 양복 맵시는 국제시장 거리의 그 누구보다 젊어 보인다.
 ‘섀비로’는 영국의 맞춤 양복 상점가인 “섀빌 로우(Savile Row)"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1세대 재단사들은 중국 만주에서, 또는 일본인들로부터 양복을 배웠다.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정장은 말하자면 영국식이었다. 일본제국이 대영제국을 흉내낸 것도 물론이고, 당시 영국 물자가 홍콩을 경유해 부산으로 들어왔는데, 거기에서도 기인한다. 스승이 지은 낡은 교본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방식과 달라진 지금의 기술을 설명하는 여용기.

S#2. 광복동의 현재
 광복동의 중심, 파출소 삼거리. 뻗어나가는 길은 과거 물길을 매축한 탓에 직선이 아니라 굽이쳐 있다. 그 흐르는 길가에 온통 옷과 신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백발의 여용기가 코가 뾰족한 윙팁 구두를 신고, 몸을 착 감는 재킷, 그리고 쉽게 소화하기 힘든 반바지를 입고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것이다. 지나가던 젊은이들이 이 모습을 둘러싸서 바라보고 있다. 25년 동안 재단 일을 접었던 여용기. 그러나 2014년 2월 현업에 복귀한 뒤로‘남포동 닉 우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다. 미국의 패션 디렉터이자 컨설턴트인 ‘닉 우스터(Nick Wooster)’처럼 옷을 잘 입는 노신사인 그를 SNS의 젊은이들은 신기해 하고, 닮고 싶어 한다.
 “옛날에 미화당 백화점이 있던 자리가 바로 여기고, 여기에서 저 끝까지, 그리고 또 저 방향으로 끝까지, 그리고 또 저 방향으로도 쭉, 양복점이 있었다. 여기가 한국의 섀비로-였다.”
이제는 기성복 상점들이 빽빽한 로드샵 거리가 된 광복동을 바라보는 여용기의 눈빛. 거기서 한 골목 내려가면 여용기의 ‘모모 양복점’과 현재 부산 최고의 재단사로 이름난 양창선(68세)의 ‘코코 양복점’이 나란히 있던 자리가 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맞춤 양복점은 거의 사라진 거리다.

S#3. 매료의 일상
 광복동 파출소에서 옛 미문화원 가는 길에 있는 남성복 업체‘매료'. 4층 건물중 2개 층은 매장으로, 한 층은 맞춤 양복 공장으로, 한 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요즘의 맞춤 양복 업계 사정을 생각하면 큰 규모다.
2층 계단을 올라서면 따뜻한 주황색 전구가 비추는 매장에 정장과 정장 관련 소품들이 모던하게 진열되어 있다. 와인잔에 담긴 핸커치프, 다양한 형태의 셔츠 깃 샘플들. 그 사이로 크고 육중한 원목 작업대가 보인다.
 매료의 매니저인 민병태(28세)가 양복을 맞추러 온 손님과 대화하고 있다. 키는 작지만 옷태가 날렵해서 훤칠해 보인다. 그가 입고 있는 겨자색의 말끔한 투버튼 싱글 재킷 또한 여용기가 만들어준 것이다. “비스포크(Bespoke) 수트는‘말한 대로 만들어지는(been spoken for)’ 옷이라는 뜻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라펠 폭, 라펠의 끝 처리, 단추의 간격, 주머니 형태 하나하나 선택하실 수 있는 폭이 다양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으니 일할 때는 편하게 입겠거니 싶은데,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고 돌아온 여용기가 갈아입는 옷은 더 격식을 갖춘 정장이다. 그는 재단사가 곧 그 양복점의 모델이기 때문에, 언제나 잘 갖춰 입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재단사들은 자신이 만든 양복을 깔끔하게 갖춰 입고 일한다.
 여용기의 작업대 옆에는 그가 자신의 치수에 맞춰서 만들어놓은 진열용 양복이 여덟벌 걸려있다. 전부 다른 복지, 다른 스타일이다. 거기에 콤비네이션 재킷과, 매료의 다른 직원들을 위해 만든 옷들까지 보면,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만든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손님들의 옷은 셀 수가 없다.
 작업대 앞에 서서, 셔츠 소매를 걷는 여용기. 긴 줄자를 목에 걸어 맨다. 재단사의 일상이 시작된다.

S#4. 백발의 할아버지, 광복동 패셔니스타
민병태 실장은 남성복 브랜드인 매료를 운영하면서 더 본질적인 옷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좋은 옷에 대한 관심이, 점차 옷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복을 향해갔다. 민병태가 거래사인 ‘고려직물’에 좋은 재단사를 추천해달라고 했고, 최동군 고려직물 대표가 여용기를 소개시켜주며 이들의 인연이 시작된다. 민병태 실장은 25년 동안 재단사 일을 그만뒀던 여용기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민병태 실장과 젊은 직원들은 그를 매장의 스타로 만들었다. 여용기의 스타일을 동시대의 감각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면서, 여용기가 쌓은 오랜 기술과 장인정신을 배우는 민병태 실장. SNS에서 여용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도 이 젊은이들의 마케팅 감각 덕분이다.
 매료는 2014년, 부산의 맞춤 양복점들 중 매출 1위를 달성했다. 젊은 손님들이 연이어 옷을 맞추려고 들른다. 여용기는 패턴을 그리고, 자르고, 옷감을 자르고, 작업을 이어간다. 그 손놀림이 경쾌하고 절도있다. 여용기가 자른 옷감을 가지고 3층 공장으로 올라간다. 공장 또한 바쁘긴 매한가지다.
 매료의 공장에서 일하는 이정재 선생. 백발이 성성한 그는 오래된 양복점인 ‘미조사’에서 일했었다. 67년 광복동 사진에서도 간판을 발견할 수 있는 ‘미조사’출신으로는 현재 ‘백모 양복점’을 운영하는 문상흠도 있다.
 초로의 강경수 선생은 말이 없는 이정재 선생에 비해서는 수다스럽다. 그는 다른 선배들과 달리 21살에 기능공 경험 없이, 가업으로 돌연 재단사로 데뷔했다. 전국기능대회에서도 입상한 적 있고, 서울 소공동 ‘로얄 양복점’에서도 일한 적 있는 수재였다. 잡담 중에도 손을 쉬지 않고 양복을 만드는 장인들. 백년된 낡은 싱어(Singer) 미싱기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매표의 스탭들이 세계 최대의 남성복 박람회‘피티 우오모' 참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여용기와 민병태는 고심한다. 민병태는 닉 우스터에 버금가는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노신사가 한국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유럽 무대에 알리고 싶어 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포토그래퍼가 최종 편집해 여용기와 민병태에게 전달한다. 여용기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다가 김포에 사는 25세의 소녀가 여용기에게 양복을 배우고 싶다고 프로포즈한 댓글을 본다.

S#5. 국제시장, 고려직물
구제 옷가게와 잡화점들이 들어선 국제시장의 낡은 건물. 한때는 1, 2층이 모두 양복점과 공장들, 그리고 직물점들이었다. 그곳에 마지막까지 버티다 스러져간 양복점들, 공장들의 남아있는 빛바랜 간판들이 2층 자리에 즐비하다. 40여 개 양복점들과 그 공장이 성업했던 시절을 그려볼 수 있다. 아직 국제시장 안에서 작업중인‘미모 테일러’에 가끔 여용기가 찾아간다. 일감이 많을 때에 일을 분담하기도 한다.
여용기는 미모 테일러에 들렀다가 맞은편의 고려직물에 복지를 가지러 간다. 현재 고려직물은 부산, 경남, 제주도까지, 제일모직의 복지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우일 라사’, ‘대양 직물’, ‘대우 직물’, ‘동양 직물’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제일모직과의 독점 계약 덕분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80년대 중반에는 월 1억 5천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최동군 대표는 이탈리아에도 복지를 공부하러 다녔다. 그 시절 수입복지 중 일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2층 창고에 빽빽이 쌓여 있는 복지들에 둘러싸여 최동군은 복지를 자르고 정리한다. 작업대 뒷켠에는 옛날 서체로 화장실과 샤워실 알림판이 붙어 있는 문들이 보인다. 오래전, 작업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수습생들까지 북적이던 시절을 짐작할 수 있다.
 여용기가 찾아오자 최동군이 낡은 계단을 통해 1층 매장으로 내려온다. 1층 매장은 깔끔하게 정리된 복지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벽장을 메우고 있다. 여용기와 최동군 두 사람 모두 백발인데, 몸에 감기는 3피스 정장까지 갖춰입고 있으니, < 대부 >의 한 장면 같다. 여용기가 최동군에게 이탈리아 이야기를 물어본다. 최동군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국제시장 어디에선가 원두커피 두 잔을 배달해 온다. 커피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뒤편으로 바쁘게 복지를 재고 자르는 직원들이 보인다.

S#6. 여용기. 거제도에서 영도로 온 형제
거제도로 향하는 여용기, 이제는 거가대교가 생기면서 섬 아닌 섬이 되었지만, 그가 이주하던 시절의 거제도는 배를 타야만 부산에 갈 수 있는 섬이었다. 먼저 기술을 배우겠다며 부산으로 떠났던 형님은 영도의 수리조선소인 ‘동명 철공소'에서 일했다. 지금도 부산에는 전국 유일의 수리조선소 한 곳이 영업중이다. 녹슨 낡은 배를 땅땅 때리는 수리공들의 망치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한다.
그를 뒤따라 여용기도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향한다. 여용기는 광복동과 영도의 양복점들을 옮겨 다니면서 남들보다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다. 바지를 배우고 양복점을 옮겨서 바지 기술자로 일하며 저고리(재킷)를 배우고, 저고리를 배우면 또 양복점을 옮겨서 곧장 저고리 기술자로 일하는 식이었다.
 그 시절 여용기는 형님과 함께 영도의 단칸방에서 살았다. 좁은 방에 둘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양복은 인치, 밀리미터의 단위이지만, 조선은 그보다 더 정교한 백분의 일 밀리미터 급 단위라며, 오차가 생기면 엔진 시동이 안 걸리니 조선 기술이 더 힘들지 않겠느냐며 두 사람이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펼치며 웃었다고 한다.
여용기가 젊은 나이에 인수했던 모모 양복점은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가게를 접은 여용기는 이후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되었다. 30대에 꿈을 이루고서 곧장 내리막길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를 도와줬던 것이 형님이었다. 동명 철공소에서 기술을 인정받아 거제도의 대우 조선소에 스카우트 되었던 형님은 수리부 기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기술자로서 자리를 잡은 형님이 길을 찾지 못하던 여용기를 그 후로도 수십년 간 묵묵히 지켜줬던 것이다.
 지금 여용기의 형님은 거제도의 전원주택에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한때 미 해군함정의 고장난 기계실을 고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기술자였다. 여용기는 그런 형님을 위해 양복을 맞춰주기로 한다. 아직도 빚진 마음이 많아 편하진 않지만, 요즘 재기한 자신이 짐짓 자랑스럽기도 하다. 형님은 양복을 모르니, 자기가 해주는 대로 입으라고 농을 한다.
 여용기는 형님을 위해 낚시 해온 생선을 회치는 솜씨도 일품이다. 손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건 잘 한다고 자랑한다.

S#7. 광복동 패션 거리의 어제와 오늘
거제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 항구에서 바라보는 롯데 백화점이 거대하다. 낮 12시가 되자 영도다리 도개 행사가 시작된다. 거대한 다리가 들어올려지고, 이리저리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 자리에 있던 미나까이 백화점을 항구에서 바라보던 옛 사진과 비교해본다.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여용기가 연안여객부두에서 택시를 타고 광복동으로 향하는 길, 용두산 공원 밑, 옛 미문화원 주변에는 대형 기성복 양복매장이 들어차 있다. 파격할인 양복 한 벌 99,000원이라는 원색의 광고판이 창가에 붙어 있다. 대형 매장을 가득 채운 잿빛 기성복들이 옷걸이에 열지어 걸려 있다.
 중심가를 차지하고 있는 SPA 브랜드들은 더 야속하다. 기성복이 빠른 유행을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패스트 패션'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SPA브랜드는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이라는 불명예가 신경쓰였는지, 헌 옷을 수거해서 90퍼센트 이상 다시 옷으로 만들고 있다는 변명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그 공정은 결국 기성복 기업의 이익에 이바지할 뿐이다. 착한 브랜드, 라는 포장은 할 수 있겠지만, 좋은 옷을 만드는 일에 대한 철학은 맞춤양복의 장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S#8. 국정사, 대한민국 양복 명장 양창선
거제도가 멀긴 하지만, 스무 시간 이상 배를 타야 했던 제주도에 비하면 멀진 않았을 것이다. 1947년에 제주에서 태어난 양창선은 그 해 있었던 4.3으로 인해, 그 다음해인 1948년에 주민등록부에 기재되었다. 여용기와는 5살 터울인데도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비슷한 성격과, 서로 이웃해 있던 양복점에서 일한 인연 덕분이다. 여용기는 모모 양복점에서, 양창선은 코코 양복점에서 각각 재단사로 일했다.
재단사로 데뷔하기 전까지, 양창선의 삶 또한 여용기와 비슷했다. 그도 섬 출신이다. 기술을 배우려고 어린나이에 고향을 떠났다. 부산항을 통해 광복동에 첫 발을 딛었다. 여러 양복점들을 옮겨다니며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코코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양창선은 이 양복점을 인수하려다가 사기를 당했다. 졸지에 길에 나앉게 된다. 오기가 발동한 그는 고리대금까지 끌어다가 국정사를 찾아간다.
국정사는 1948년에 설립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으로, 올해로 창립 68주년을 맞이한다. 원래는 46년, 미나카이 백화점 양복부에서 양복을 배웠던 김필곤에 의해, 당시 ‘조선방직’이 있던 범일동 앞에서 ‘태양 피복사’로 창업했었다. 김필곤은 은퇴할 시기가 되어서 동생인 김영곤에게 국정사를 넘긴다. 그러나 재단사가 아닌 동생은 국정사의 운영을 그리 잘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양창선이 찾아온 것이다. 양창선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김필곤과 김영곤은 모든 국정사의 자산을 양창선에게 넘겨준다. 그 당시에 썼던 계약서가 아직도 있다. 남아 있는 복지들, 미싱기, 다리미, 가위 하나까지 그 값을 상세히 매긴 표가 함께 있어 그 시절의 양복점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양창선은 쭉 광복동을 지켜왔다.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명장’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던 중 5년 전, 이제 고급 양복의 수요층이 더 이상 광복동에 없다고 판단한 양창선이 큰 결단을 내려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지하로 자리를 옮겼다. 그에게는 광복동 시절이 끝난 것이다.

S#9. 여용기와 양창선, 라이벌이자 벗
여용기와 양창선,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다. 양창선이 국정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되어, 81년 12월에 남포동에 대화재가 있었다. 기둥만 덩그러니 남은 건물 천장에 천막을 치고 영업을 재개했다. 비가 오면 복지가 젖을까봐 젖은 바닥을 첨벙첨벙 뛰어다니며 그렇게 6개월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모모 양복점’을 아예 인수해서 사장이 된 여용기가, 바로 옆 점포 자리가 비었다며 양창선에게 연락을 해왔다. 건물주에게 부탁하여 좋은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게 손을 써두었던 것이다. 코코 양복점을 떠나야 했던 양창선이 여용기 덕분에 그 자리로 국정사의 대표가 되어 돌아갔다.
 이후 이웃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 양복조합의 중심인물이었던 양창선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내려온 경남권 장교복과 보안대 근무복 제조업체 입찰에 관여한다. 어마어마한 수주량을 받아내어 승승장구한다. 한편 거제 출신인 여용기의 모모 양복점에, 거제 출신인 김영삼의 측근들이 드나들면서 뜻하지 않게 야권인사가 된다. 김영삼이 머물던 동양호텔에까지 드나드는 그를 곱지 않게 보던 정권에서 꼬투리를 잡아 압수수색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쪽이나 양복이 잘 팔리기는 매한가지인 호시절이었다고 한다.
 여용기가 25년 전 개인 사정으로 재단일을 관두며 두 사람의 인연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매료에 합류한 여용기가 굳은 손을 풀기 위해 국정사를 찾아가며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여용기는 두 사람의 스승인 박종규의 교재를 다시 찬찬히 보면서 이론을 다시 익히고, 국정사에서 잃었던 손 감각을 되찾아갔다.

S#10. 좋은 옷이란.
여용기가 해운대‘국정사’로 양창선을 만나러 간다. 매료에 일감이 너무 몰려 국정사의 공장에 의뢰하기 위해서다.
피티 우오모에 가져갈 옷에 대한 고민을 여용기가 이야기 하자, 양창선이 근래에 본 영화 < 킹스맨 >의 이야기를 꺼낸다. 양창선은 < 킹스맨 > 요원들이 입고 있는 정장을 보며, 최근 고심중이던‘암홀' 패턴에 대한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움직이는데 더 편안해야 한다는 것. 양창선이 요즘 만들어진 양복의 팔을 뜯어내고 그 암홀의 위치를 마네킹에 입혀 보여준다. 한국의 재단사들은 아직 옛 패턴에 머물러 있지만 자신이 연구한 바, 이미 암홀 패턴의 세계적인 경향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 킹스맨 >의 요원들이 양복을 입고도 격렬히 움직이는 데에 무리가 없었던 이유라고 한다.
 봄도 없이 여름이 되어버리는 부산 날씨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봄과 가을이 애매하게 여름에 흡수되어버린 날씨 탓에 이 시기의 복지 재질을 선택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하는 두 사람. 양창선은 나폴리도 부산과 비슷하지 않겠나 이야기 한다.
 양창선이 옛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6~70년대, 소위 콘티넨탈 스타일이라고 했던 정장들은 거의 현재와 비슷한 핏을 보여준다. 바지 나팔처럼 퍼지는데, 그 부분이 조금 다르다. 요즘은 바지가 더 짧고 붙는 추세다보니, 바지 길이에 맞춰 재킷 길이도 줄어든 것도 조금 다르다.
  지금은 맞춤 정장집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위아래를 깔끔하게 맞춘 정장만을 한다. 비스포크 테일러는 여하튼 결국 맞추러 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이루어내주는 것이 사명이다. 시절에 따라, 사람에 따라 원하는 바를 맞춰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용기는 조금 다른 생각이다. 아무리 맞춤양복이 유행을 따른다고 해도, 입는 사람이 편하지 않으면 ‘옷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좋은 옷에 대한 기준, 한 사람을 위한 옷이 기성복과 어떻게 다른지 뚜렷한 소신을 가진 두 사람.

S#11. 국정사 공장과 젊은 후계자들
양창선의 밑에서는 한경미(25세, 여)와 이순호(26세, 남)가 양복을 배우고 있다. 한경미는 학생부로 전국기능경연대회에 나가기 위해 맹훈련중이다. 아직도 앳된 소녀 같은 외모와 달리, 훈련을 하지 않을 때는 양창선이 운영하는‘국정사' 공방에서 바지를 만드는 장인으로서 일할 정도로 이미 실력을 키운 상태다. 한경미의 옆에는 양창선이 60년대부터 알고 지내던 ‘영감님’이 아직도 일하고 있다. ‘영감님’은 그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장인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이순호는 이제 갓 양복을 배우기 시작해서 아직은 일이 서툴다. 그는 원래 전기 기술을 배워서 취직하여 일하던 중이었는데, “나중에 내가 은퇴할 시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연 옷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좋은 옷을 만들고 싶은 열망으로 여용기를 발견한 ‘매료'와 그 반대로 양창선에게 좋은 옷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국정사'는 각자의 방식으로 명맥이 끊기려 하는 장인의 기술을 이어가보고자 길을 모색하고 있다.

S#12. 옛날 사진들.
양창선이‘박영감 기념사진’이라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1969년 추석, 아직 도개교였던 시절의 영도다리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인데, 지금까지 함께 일 하는 영감님이 찍혀 있다. 예전 사진들을 살펴본다. 여용기와 양창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78년 디자이너스 클럽(일명 디-크럽)의 사진도 있다. 여용기도 그 사진이 있다고 말한다. 현업에 있는 사람은 네다섯 명 정도 손에 꼽을 수 있다. 74년 남성복 패션쇼에서 모델시절의 도신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그 중‘이글 양복점’앞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이글 양복점의 주인 박희성. 10년 선배인 박희성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양창선. 자기보다 먼저 대한민국명장 칭호를 받았던 박희성, 현업 최고령의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된다.
 국정사를 떠나며 여용기가 양창선에게 광복동에도 한 번 놀러오라고 이야기 한다.

S#13. 절벽 위의 이글 양복점. 80대의 박희성 선배
용두산 공원 아래, 공사가 한창이다. 부숴진 철근 콘크리트가 비탈에 쌓여 있고 그 뒤에 축대가 서 있다. 절벽같은 축대 위에 간판 하나가 보인다. ‘이글 양복점.’
 양창선은 여용기를 만난 김에 이글 양복점의 현재가 궁금해 수소문한다. 부산데파트 아래에 있었던 이글 양복점은 이미 자리를 옮긴 지 오래다. 예전에 공장이 있던 곳으로 상점을 옮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본다. 용두산 공원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길 옆으로 난 샛길, 공사장 가림막 사이를 지나면 샌드위치 판넬 가건물에 들어선 ‘이글 양복점’이 있다. 80대의 박희성이 양복도 입지 않고서 휑한 양복점을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 명장, 무거운 명패가 가게 안에 걸려 있다. 그는 양복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명장 칭호를 받았던 재단사다.
 5년전 광복동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박희성을 봤던 양창선은, 같은 명장인 박희성의 현재 모습에 먹먹해 한다. 액자에 넣어서 해운대의 고급 호텔 지하 매장에 걸어놓은 명장패와 비교되는, 샌드위치 판넬에 걸려 있는 박희성의 명장패가 비교된다.
 매료에 있던 잘 손질된 싱어 미싱기와 달리 볼품없이 낡아버린 이글 양복점의 싱어 미싱기들은 작업을 하지 않은 지 오래다. 깡마른 박희성의 목에도 줄자가 걸려 있다. 그가 편지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며 신세 한탄을 한다. 부산시에서 보낸 공유지 무단점거에 대한 변상금 내역서다. 그리 큰 키도 아닌데 양창선 앞의 박희성은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오래 전 사진속의 멀끔한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의 위태로운 모습은 기성복에 밀려난 맞춤양복 업계의 장인들의 현재를 연상시킨다.

S#14. 피티 우오모로 가는 길
여용기는 서면 아르마니 매장에 가서 새로 나온 양복을 유심히 살펴본다. 함께 온 민병태에게 좁은 아르마니 라펠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민병태와 여용기는 그보다는 넓은 라펠을 선호하는 데에서 의견이 합치해 웃는다.
 컴퓨터로 피티 우오모 사진들을 보는 여용기. 민병태는 여용기에게 피티 우오모에 가기로 했던 약속 이야기를 한다. 여용기가 입을 옷들을 고르고, 새롭게 만들어 입을 옷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한다.
본격적으로 작품 준비에 돌입한다. 그렇지 않아도 근래 매료에서는 나폴리 스타일의 양복을 많이 만드는 중이었다. 가령 어깨의 패드가 없고, 라펠의 폭이 넓은 식이다. 이런 경향은 아무래도 피티 우오모를 향해 있는 민병태와 여용기의 시선 때문이다.

S#15. 세대 갈등
여용기와 민병태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젊은 손님들의 요구에 대해서 여용기가 장인으로서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의견 충돌은 조금씩 있었을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여용기와 매료의 젊은 스탭들은 비슷한 것을 꿈꾸고 있다보니 비슷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큰 충돌이 없다. 손님 가봉을 할 때도 여용기와 젊은 직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손님에게 옷에 대한 설명을 한다. 여용기가 바늘로 가봉을 잡고 있으면 그 치수를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젊은 직원이 받아적고, 손님의 의문에 대해서 여용기가 이야기 하면 직원이 맞장구치는 식이다. 매료 내에 맞춤 양복 브랜드인‘르 매료’를 만드는 과정을 민병태와 여용기가 함께 했기 때문에 ‘르 매료'의 철학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국정사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여기는 양창선의 철학대로 운영되고 있고, 거기에 젊은이들이 기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긴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영국과 이탈리아에 유학까지 다녀왔던 30대의 젊은 여성 재단사가 있었다. 서울과 부산 곳곳의 양복점들을 찾아다니다가 국정사에 와서야 이곳의 제작 시스템이 자신이 꿈꾸던 곳이라며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국정사에서 재단사로서 3년가량 일했던 이 여성재단사는 양창선과 갈등을 겪으며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 공장에서 일을 배우며 있던 20대의 청년들도 상당수가 일을 그만둔다.
 양창선은 기술자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게 노력하도록 만들지만, 또 한켠으로는 사양세인 업계에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양창선은 후계자 양성에 열심이다. 신라대학교 산학협력단 디지털 패션 센터에서 ‘남성 맞춤정장 봉제실무’를 강의하는 양창선. 맞춤 양복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 학생들의 진지한 열의가 느껴진다.

S#16. 피티 우오모 진출.
여용기와 매료의 직원들은 이탈리아 피렌체로 향한다. 옷 짐만 해도 한가득이다. 박람회에 직접 참가는 못하지만, 여용기를 통해 한국의 비스포크 기술을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여용기의 옷차림은 피렌체의 화려한 날씨에 걸맞게 화사하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백발의 동양인이 정장을 입은 맵시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며 관심을 가진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만든 한국관에도 들러본다. 남는 시간에 형님 드릴 선물을 골라본다.
 매료 직원과 여용기는 이탈리아 복지도 살펴본다. 높은 수의 얇고 하늘거리는 이탈리아 복지들이 아름답다. 새 시즌에 매료에서 런칭할 옷을 위해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복지와 부자재들도 매입한다. 새로운 유행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밤마다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없는, 영락없는 양복쟁이들이다.

S#17. 한 벌의 양복. 형님께 드릴 선물.
매료 스탭들은 꿈같았던 이탈리아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다. 부산은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서 길가의 야자수가 넓은 잎을 드리우고 있다. 부산 사람들의 옷차림은 서울보다 먼저 여름을 향해 있다. 매료 또한 여름옷을 내어놓기 시작한다.
 여용기를 취재하러 온 대학생 기자들. 여용기가 장인으로서의 고집, 지켜야 하는 선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게 참 어려워. 내가 아무리 좋은 옷이라고 생각해도, 결국 손님이 좋아해야 좋은 옷이다”라고 말하는 여용기.
 그렇다면 결국 좋은 옷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 좋은 옷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장인들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작업대에 선 여용기. 바빠서 미뤄뒀던 형님의 옷을 이탈리아에서 사 온 복지로 만들려고 한다. 거제도에서 쟀던 형님의 치수로 패턴을 그린다. 한 땀 한 땀 만드는 한 벌의 양복을 만드는 공정이 또 다시 시작된다. 깜짝 선물을 위해 가봉은 생략한다. 형님의 신체를 잘 알고 있기에 가봉을 할 필요도 없다.
 복지에 패턴지를 올리고, 초크를 사각사각 깎아서 선을 따 그려나간다. 묵직한 가위로 복지를 자른다. 모든 패턴을 다 잘라내고선 시침질을 시작한다.
 드디어 완성한 한 벌의 양복을 들고, 여용기는 배에 오른다. 배는 광복동을 뒤로하며, 영도다리를 뒤로하며 부산항을 떠난다. 세차게 포말을 뿌리며 바다로 나아가는 배의 모습.

S#18. 장인. 대를 잇는 일
지금 국정사에서 일하는 이순호는 앞으로 5년여의 커리큘럼을 마스터 해야지 재단사가 될 수 있다. 6개월째 일하는 중인데, 주로 다림질이나 잡일을 하면서 이제 바지를 배우고 있다.
70년대식의 도제교육이 아니라, 산학협력 경험을 살려서 양창선이 나름대로 고안한 커리큘럼을 통해 일을 배우는 시스템이지만, 그 기간 동안의 생계라든가 여러 가지 고민이 많다. 기술경연대회에 나가는 한경미를 보면서도 여러가지 고민이 교차한다.
 양창선은 ‘학내 명장 공방 제도'에 대한 국가 사업 지침을 받고서는 국정사 주변의 학교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이미 전문대학이나 고등학교에 다른 분야의 명장이 설립한 학내 명장 공방들을 탐방해본다.
10대부터 일을 배웠던 2세대 재단사들은 20대 후반만 되어도 기술을 배우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손이 굳어버린다는 것이다. 10대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기술을 빨리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이 기술 습득 기간을 견디고 장인의 길을 걸을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매료 또한 양복을 배우고 싶어 하는 패션 전공의 젊은 직원들의 열망이 있다. 그러나 막상 후진을 양성할 방법을 뾰족히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주문 물량을 맞춰나가며 매료라는 브랜드를 키우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재단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이를 실현시켜 줄 공장의 장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걱정이다. 젊어봐야 50대, 많게는 70대까지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로면 공장 장인들 또한 재단사들과 함께 대가 끊길지 모른다.